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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게시된 글은 필자가 학과 시절 발표한 발제문이다. 현시대 자본주의의 제문제로부터 해결을 시도하려는 세계의 학자들이 그들 각자가 개진해 온 이론과 방법에 대해서 서로 토론을 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은 2007년도에 작성되었다. 참고할 것은 본문의 내용이 다소 압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때때로 활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적인 흐름과 의미만을 취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다소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제거하였다.

 

서론

 

자본주의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자본주의로 인해서 빈부격차가 증가하고 인간성의 파멸이 점점 더 가속화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변혁을 절실하게 느낀다.

여기서 다룰 논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John Holloway의 ‘권력 장악 없는 변혁’을 중심으로 Alex Callinicos, Junaid Alam, Michael Albert의 변혁을 위한 서로 다른 주장이 있다. Holloway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Marina Sitrin의 Holloway와의 인터뷰를 참조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변혁의 커다란 틀 속에서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서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들의 논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특성과 변혁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하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방법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Holloway는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권력 장악 없는 혁명’을 주장한다. 지난 혁명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국가 권력의 장악을 통한 혁명은 모두 실패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자기해방(self-emancipation)’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Callinicos는 ‘자기해방’을 통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Holloway의 의견에 따르면서도 Holloway의 ‘자기해방’을 통한 과정은 국가 권력에 의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서 전략적으로 맞서서 현존 권력의 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통한 변혁을 주장한다.


Alam은 Holloway의 패배주의적이고 은둔적인 투쟁에서 벗어난 국가 권력을 통한 변혁을 말한다. 국가의 막대한 자본은 폭 넓은 사회적 관계와 조직을 통제하는데 기초를 마련해준다. 인간적 원칙이 권력을 갖는다면 오히려 권력이 변혁을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Albert는 파레콘(참여경제체제)을 통해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을 없애는 것이 아닌, 권력의 공정한 분배를 통해 모두가 함께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무분별한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조정자’를 거부한다는 그의 의견은 Holloway와 유사하다.


 

Ⅰ.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


1.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의 노선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혁명을 통한 변혁의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되어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혁명은 원인이 되는 ‘국가 권력’의 전복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 권력’의 탄생을 통한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와 건설을 목표로 했고 그러한 혁명은 실패했다. 역사적인 혁명의 사례를 통해서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혁명의 볼셰비키는 민주적 자유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적 정권탈취와 체제변혁을 위하여 혁명적 전략전술을 통해 이룩되었다. 볼셰비즘은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의 적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무엇보다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가혹성, 대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비민주적 엘리트주의, 인위적 폭력론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후에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 과정을 거쳤다. 러시아 혁명을 통한 볼셰비키는 후에 소련공산당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일부 받아들였으나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로 몰락되었다. 소련공산당은 비록 몰락하였지만 그것은 혁명을 통한 인류 최초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서 세계에서 가장 큰 틈새를 만들었다.


2001년 아르헨티나 민중 봉기는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난 반세계화운동이다. 투쟁은 자본에 의해서 조직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비판과 수평적․민주적․반제도적 정치를 목표로 도로점거와 ‘피케테로스’(Piqueteros: 피켓을 든 사람들)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민중 봉기는 실업자들이 조직되고, 집합행동에 참여하고, 경제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조직 노동자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교섭을 하고 양보를 끌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큰 희생이 있었지만 국가 권력은 아직도 존재한다.


베네수엘라 혁명은 카라카스 봉기 이후 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차베스 대통령을 우익 쿠데타 세력이 사임 압력을 가하고 거짓 사임 보도를 내보내자 민중이 차베스의 복귀를 요구한 민중 운동이다. 이 운동은 93년 칼데라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민의 70%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석유를 비롯한 주요 기간산업의 민영화와 97년 외국 자본이 베네수엘라 은행의 지분 41%를 쥐는 등의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배경으로 한다. 차베스는 민중의 뜻을 담은 ‘볼리바르 헌법’을 제정하고 국영화한 석유회사의 재원으로 무상의료, 무상교육, 국영식품점을 마련 민중을 위한 국가 운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정권은 여전히 국가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2. Holloway가 본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의 문제점

 

앞서 살펴본 것처럼 Holloway는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이 실패한 것은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에 있다고 말한다.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은 혁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국가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권력은 세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원리가 될 수 없다. 그는 권력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첫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투쟁을 이끈 지도자나 그가 속한 정당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는 투쟁을 일으킨 최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된다. 선거나 정당을 통해서 변혁을 하려는 운동은 운동의 목적이 권력을 얻는 것에 집중되게 한다. 그리고 막상 권력을 얻었을 때에 대중들에게 지지를 얻은 공약이나 변혁의 목표는 실행되지 않는다. 이는 대체로 국가 형식이 자본과 야합하기 때문에 투쟁의 목적과 지도자의 목적이 분리된다. 좌파 혁명의 역사에 ‘배신’ 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지도자들이 악한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 체제의 자본의 원리가 그들을 배신을 하게끔 이끌기 때문이다.


둘째, 국가를 통한 투쟁은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논리여서 투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휩쓸리게 된다. 자본주의는 경제체제가 아닌 돈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명령의 체제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 발전시킬 목적으로 수 세기 동안 발전된 것이 바로 국가와 조직이라는 형식이다. 국가를 투쟁의 준거로 생각하면 국가에 깊이 침투한 자본주의 원리는 투쟁을 어느 한 개인이나, 최초의 목적과는 벗어난 특수한 목적으로 이끈다. 그래서 결국 투쟁 이전의 현실과 타협하게 만든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모든 투쟁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부정과 착취, 살인과 파괴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셋째, 국가는 투쟁을 공간적으로 제약하여 세계적 운동으로 투쟁을 이끌지 못하게 한다. 국가는 세계와 특정 영토의 경계를 분할하여 제한한다.


자국민과 외국인, 정책의 차별성으로 인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총체적인 운동을 막는다.

 


Ⅱ. Holloway의 ‘권력 장악 없는 변혁’

 

1. ‘권력 장악 없는 변혁’의 철학적 기반

 

‘권력 장악을 통한 변혁’의 문제의 핵심은 국가가 자본의 원리에 따르기 때문에 국가를 준거로 삼는 혁명은 자본의 원리를 그대로 계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혁은 ‘권력 장악이 없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Holloway의 ‘권력 장악 없는 변혁’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투쟁은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원리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는 단지 일부의 의견만을 대신한 기관일 뿐이다. 투쟁의 중심축을 모두가 직접 창조하기를 바라는 사회에 맞추고, 지금 자기가 있는 현실에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기결정’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결정’의 욕구를 갖고 타자에 의한 결정에 반대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관계된 사회적 관계와 생산 활동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내부에서 대안적 생산 활동과 대안적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그러한 대안적 사회 활동 간의 사회적인 연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자본주의에 작은 균열(Cracks)을 낸다. 균열을 통해서 비자본주의의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틈새혁명(interstitial revolution)’ 이다.


둘째,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사회관계를 낳는 것이므로 권력 장악을 통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결정’의 투쟁 방식은 국가권력의 억압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국가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거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변혁을 꽤하는 것은 그 안에서 스스로 그러한 행동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도와 충돌된다. 권력 장악을 통한 투쟁은 그것 자체가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며 그것은 투쟁의 목적과 상충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결정’의 투쟁에 대한 국가의 억압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장은 있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권력 장악이 없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자기결정’의 힘은 무장과 권력이 아닌 공동체 속에서 저항에 대한 통합적인 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셋째, 투쟁은 지역 수준을 벗어난 직접민주주의 체계인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본의 힘은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본에 대항한 투쟁은 자본의 힘에 밀려 실패하기가 쉽다. 지역적 투쟁의 규모로는 이러한 거대한 자본에 맞서기가 어렵다. 이것은 끊임없는 교육과 실험을 통해서 시도되어야 한다.


넷째, 공간적인 투쟁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 기초한 시간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국가라는 공간 안에서의 투쟁은 특정 권력과의 투쟁이고 지역적인 투쟁일 뿐이다. 국가나 지역의 특정 공간에서의 투쟁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곧 그 자리를 잠식한다. 시간적인 투쟁의 개념은 자본이 침투한 모든 영역에서 단기간의 투쟁이 아닌 장기간의 지속적인 자본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자본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벗어난 철저히 인간적인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 ‘권력 장악 없는 변혁’의 사례

 

Holloway는 자신의 ‘권력 장악 없는 변혁’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멕시코의 ‘사빠띠스따’운동을 든다. 그들에게 '혁명'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무엇이다. 인간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해답으로서의 혁명을 거부하고, 혁명을 끊임없는 질문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엄청난 빈곤과 착취와 불행 속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인간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 인간적 주체'에게 묻는 것이며, 이러한 물음을 통해 '자유, 자치, 민주'를 획득해나간다. 그래서 그들에게 혁명은 정의되지 않고, ‘끊임없이 물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혁명적 실천과 문화적 실천은 구분되지 않으며, 동일한 과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문화와 혁명은 '삶'으로 통일되어 있고, 스스로가 삶을 지배하고 통치해 나가는 과정이 곧, '문화적 실천'의 과정이자, '혁명적 실천'의 과정이다.


사빠띠스따에게는 조정자 계급이 없다. 단지 명목상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인 ‘마르꼬스’가 있을 뿐이다. 민중이 모두 사령관이고, 권력은 사실상 민중 모두에게 있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위기로부터 지킨다. 그들은 복면을 쓰고 총을 들고 스스로를 지키며, 농사를 지으며 자본주의에 반대한 스스로의 삶을 만들며 생활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본에 반대를 하며 수직적 위계질서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한다.

“우리는 걷는다. 뛰지 않는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투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목적에 대해 ‘지금 바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사빠띠스따의 원리이다. 단기간의 투쟁으로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하나의 경제적, 명령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민중이 그들이 원하는 수평적인 관계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투쟁은 사빠띠스따가 말하듯 장기적이고 끊임없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Ⅲ. Holloway에 대한 비판

 

Callinicos는 ‘자기해방’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Holloway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권력을 무시하는 투쟁은 실패할 것이고, 자기조직을 통한 혁명과 권력의 결합을 통해서만이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한다. Alam은 Callinicos가 권력 장악을 통한 변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동의하며, Holloway의 방법은 지적인 패배주의이며 정치적 마비 상태의 장벽에서 투쟁을 하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Callinicos와 Alam은 혁명에서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Albert는 권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 장악을 통한 것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내세운다. Albert의 입장은 파레콘으로 요약되며 그것은 자본의 모순을 제거하며 권력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Callinicos의 의견은 이렇다. 첫째, 비자본주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은 국가의 자본 권력에 의해 공격받고 실패한다. Holloway의 틈새혁명은 국가 자본가 권력에 의해 무너지기가 쉽다. 국가를 단지 무시하고 이에 서서히 반대하는 움직임은 곧 사유화를 극복하는 자본과의 투쟁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투쟁은 자본에 정면으로 전략적으로 맞서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자본의 힘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집중화와 중심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기 조직’에도 국가 권력에 맞설 수 있도록 파편화되고 지방적인 활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투쟁의 힘을 한 곳에 집중하고, 통합화해야 한다. Antinio Gramsci의 투쟁에 대한 변증법적 작용과 같이 투쟁은 집중화와 중심화 그리고 ‘자가 조직’을 결합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셋째, 그동안 역사적으로 혁명이 실패한 것은 충분히 강력한 운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의 틈을 만들만큼 강력했지만, 자본의 힘에 패배했다. 자본주의에 패배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 2001년 아르헨티나 민중 봉기는 투쟁을 통해서 정부가 전복된 경험을 보여주었으며,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생산체제와 계급이 없이도 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중 봉기로 인한 큰 희생이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Holloway는 지역적 투쟁 규모의 한계를 언급하지만,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가 권력에 대항한 투쟁의 시도가 필요하다.

Alam의 의견은 권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Callinicos의 의견과는 유사하지만, ‘자기해방’의 방법에 대해서 반대한다. Alam은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경우를 살아있는 훌륭한 예로 제시하며 의견을 말한다. 첫째, 국가를 통한 혁명이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힘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통제체제이다. Holloway는 ‘국가가 지도자와 대중을 분리시킨다.’라고 했으나 그것은 국가에 의한 것이 아닌 개인의 문제이다. 차베스의 경우를 보면 그것을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국가가 투쟁을 공간적 제약으로 한정 짓는다고 하지만 공간적 제약은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자본의 현실은 도처에 있다.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본의 환경 속에 뛰어들어 자본과 반대되는 힘으로 대항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둘째, 국가를 통한 변혁은 운동의 결함을 만들기 보다는 결함을 드러낸다. 자본의 힘이 국가 내부에 깊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를 통한 변혁을 수행하면서 우리 자신의 투쟁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내야 한다. 직접 자본과의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투쟁의 난점을 파악해야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국가와의 투쟁을 피하는 것은 투쟁의 약점을 숨기는 것이다.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의 문제를 돌아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국가는 혁명을 위한 큰 기반이 된다. Holloway는 국가와 선거의 투쟁 무대를 무시했다. 그는 국가와 민중 사이를 이분법적 체제로 단순화했다. 그는 민중을 통한 투쟁만이 옳고, 국가를 통한 투쟁은 옳지 못하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Holloway가 말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와 ‘자기해방’을 통해서는 자본의 명령을 깨뜨릴 수 없다. 오히려 ‘자기해방’은 자본으로 생성 가능한 사회와 지원 구조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막대한 자본과 결합한 국가 권력을 통해서 민중이 바라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국가는 민중에게 명령하고, 민중의 협조를 이끌고, 민중을 위한 개발과 방어를 하고, 폭넓은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는데 더 나은 기초를 마련해준다. Holloway가 말하는 ‘자본주의에의 거부’의 개념은 국가적 경제 토대를 통해 대안 사회를 세우는 ‘적극적 활동’으로 바꿔야 한다. Alam의 의견은 “인간적인 원칙이 없는 권력은 타파하고, 권력 없는 인간적 원칙에 대해서는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에 잘 드러난다.


Albert는 Holloway가 ‘조정자 권력’을 거부했듯이,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권력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권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경제체제를 통한 방법을 주장한다. 그것은 참여경제체제이다. 참여경제체제는 국가를 통해서 혹은 국가에 대항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Holloway, Callinicos, Alam과는 다른 의견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내의 모순을 제거하고 국민이 모두 평등하도록 장기적인 활동적 참여를 이끄는 체제이다.


참여경제에서 권력은 발언권으로 표현된다. 노동자와 소비자 평의회를 구성해서 모든 사항에 대해서 각 주민이 영향을 받는 정도만큼의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곧 권력이 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분배된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조정자 계급의 타파’는 매우 중요하다. 조정자주의는 불평등과 권력의 집중을 야기한다.


참여경제의 목표는 주민들의 삶의 개선, 민중의 권력 강화를 통해서 민중 스스로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이러한 노력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이러한 목적이 모두에게 명료하게, 넓게, 효과적으로 퍼져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선거나 정당의 공간을 통해서든 혹은 그렇지 않은 대안 공동체를 통해서든 가능할 것이다. 그의 국가의 개념은 국가 권력을 탈환해서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고, 모든 국민에게 권력이 돌아감으로써 ‘국가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Ⅳ. Holloway의 반론

 

Holloway에 의하면 국가는 우리가 배제되는 사회적 관계의 자본주의 형태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서서 Callinicos, Alam의 반론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는 Callinicos가 말하는 노동자 국가와 근본적인 민주화의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20세기에 국가에 의한 가장 끔찍한 억압의 과정을 들면서, 국가는 진정한 민주적 조직, 의회조직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조직의 형태라는 것을 강조한다.


Holloway의 국가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은 국가를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Callinicos와 Alam은 Holloway가 국가를 배제하고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Holloway의 의도는 국가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관계의 특수한 형태로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형태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다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논리나 권력, 공간에 대한 준거점으로서의 국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다.


Alam이 지지하는 베네수엘라의 경우에 대해서 Holloway는 그러한 사례가 투쟁이 권력을 얻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지향적 접근과 비국가 지향적 접근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Holloway의 자본주의에 균열을 낸다는 것의 의미는 무겁게 압박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할 때에야 자본주의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임시적 공간을 만들고, 그 균열 안에서 우리가 만들기를 바라는 사회의 형태를 지향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반대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반대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Callinicos와 Alam과 같이 국가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실상 이러한 자본주의의 균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Holloway의 의도는 투쟁의 시점과 투쟁의 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Holloway의 논의는 투쟁의 특별한 정의를 갖지 않고 국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며, 국가의 공간 안에서 투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에 대한 논의의 중심을 Holloway는 자본주의 국가 권력의 성격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원리에 두었고, Callinicos와 Alam은 국가 권력 자체에 논의의 중심을 두기 보다는 여러 투쟁의 사례를 통해서 권력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 권력 장악을 통한 변혁이 더 확실한 변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Albert도 자신의 논의가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제체제의 문제, 조정자 계급의 문제에 중심을 두었다. 이러한 모든 입장을 종합해 본다면 사실상 자본주의 원리가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변혁의 가능성에 근본적 한계를 가한다는 Holloway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Holloway의 방식은 자본의 성격에 대한 원리적 이해의 중요성을 통해 권력 장악을 통한 변혁의 어려움을 깨우치고 근본적 원리로부터의 변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Holloway의 의견은 실재적인 변혁의 방법으로는 부적합하게 보인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 힘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Holloway의 방법은 실현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모순과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의 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원리로 이익을 보는 자들의 힘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거대한 힘은 이미 우리의 삶의 방식과 행동을 결정하게 만든다. 자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과 자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삶 사이에서 모순과 한계를 느낀다.


이러한 자본주의를 벗어나 진정 우리가 살고자 하는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현재 남미의 큰 운동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작은 투쟁 심지어 우리의 일상의 불만과 변혁의 의지까지도 새로운 세상을 위한 작은 움직임이 된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토론 참가자들은 견해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견해를 제시하고 행동한다는 데 있어서는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따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변모하고 증가하는 자본의 힘에 대한 Holloway의 의견을 경청하고, 일상생활에서부터 자본에 대해 거부하고 맞서는 태도를 유지하며, Callinicos나 Alam의 논점과 같은 변혁을 위한 현실적인 직접적인 실천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자본과 국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지금 현재의 자본에 순응하지 않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적인 삶을 위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문제의식을 갖고 투쟁과 실천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Can We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John Holloway
「A Response to John Holloway: Taking Power Seriously」, M. Junaid Alam.
「Can We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A debate: J. Holloway and A. Callinicos.
「A Debate on Anti Capitalist Strategy (with John Holloway), Michael Albert.
「Walking We Ask Questions (A Interview with John Holloway)」, Marina Sitrin.
「Against and Beyond the State (An Interview with John Holloway)」, Marina Sitrin.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John Holloway.
「Can We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John Hollo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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